태평 [太平/泰平]
(명사) 1.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 없고 평안함
2. 마음에 아무 근심 걱정이 없음
경남 사천 비토리에는 ‘별학섬’이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물이 들고 나며 학과 자라의 모습을 하여 별학섬이라고도 하고, 벼락을 맞은 섬이라 하여 ‘벼락섬’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작은 섬입니다. 그 섬은 현재 태평농법의 ‘고방연구원’이 자리한 곳이며, 태평농이 연구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태평농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엔 태평농을 창안해낸 이영문 선생이 머물고 있습니다.
- 비토리 선착장에서 바라 본 별학섬의 모습
몇 번의 교육을 받기 위해 별학섬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선착장에서 내려 연구원으로 오르는 길에 ‘마영’이라는 커다란 말도 만날 수 있었고, 자유롭게 자라나는 자생초들과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다양한 종의 작물들이 건강한 모습을 뽐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계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 때문인지, 섬 곳곳에 스스로 만든 많은 기계들이 자리해 있었는데, 태양열-태양광 발전기부터 인공 부화기, 통통배, 각종 엔진과 수제 보일러 등 자칫 농업 연구원이 아닌 기계 기술 연구원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섬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리다 보면 이내 이영문씨를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호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갈까 합니다. 태평농을 따르는 많은 분들이 공개적인 글이나 언사에서 이영문씨를 ‘선생’으로 지칭하지 않는 데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제 글에 ‘이영문씨’라는 호칭을 쓰는 것 또한 지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개적인 글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적인 호칭을 따르는 것임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태평농부들이 계실까봐 조심스런 마음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선생님이고 스승님이지 불특정 다수의 선생님은 아니니까. 오히려 개인적인 자리에서의 이야기는 편안한 마음으로 선생님이라 부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글은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한 기우일지 모르는 걱정, 잠시 늘어 놓았습니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태평농법. 나라가 안정되고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하게 해주는 농법. 마음에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짓는 농사.
태평이라는 뜻을 헤아리면 태평농법의 뜻은 대략 위와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따른 태평농의 정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태평농은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농사꾼들이 선택하는 길이며, 또한 행복한 게으름뱅이 농부들이 선택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힘을 믿고 그 질서를 따르며 하는 농사이기에 힘도 덜 들고 비용도 덜 투입되는 ‘행복한 게으름뱅이’ 농사꾼을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영문씨는 어렸을 적부터 기계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그 취미가 지속되어 어지간한 것들은 손수 만들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현재에도 다양한 기계 기술에 대한 교육도 함께 진행하고 있는 중이고요. 그런 그의 성향을 살려 젊은 시절 농기계 사업을 했었다고 합니다. 농기계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다보니... 유난히 농기계가 쉽게 자주 고장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처음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농기계를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농사를 시작한 것이죠.
당시 (혹은 지금까지도) 농기계는 주로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계들의 고장이 잦은 것이 일본과 우리나라의 토양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우리 땅에 적합한 농기계를 개발하기 위해 더더욱 농사에 매진하였다고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농사에 대해 알아갈 수록 농기계 보다는 농사 자체에 대한 애정이 커진 듯 합니다. 점점 더 깊이 연구하고 실험하며 그는 현행(관행)농법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갔고, 종국에는 그것의 폐해가 지닌 심각성을 직감하여 대안을 찾는 일에 온 정신과 시간을 쏟아 붓게 됩니다.
지프 한 대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우리 농사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농약 없인 힘들다’ -> ‘농약이 없던 시절엔 어떻게 농사 지었을까?’
‘비료와 거름은 꼭 필요하다’ -> ‘그런 것 없이 자라나는 돌종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일련의 질문들에 대해 잃어버린 퍼즐 조각들을 맞춰가듯 하나씩의 답을 전해주시는 전국의 어르신들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서서히 자신만의 농법을 완성해나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년의 세월이 흘러 자신의 농법으로 농사지어 주변의 관행농부들과 비교해 전혀 부족할 데 없는 결과를 얻어낸 뒤 그는 자신의 농사에 ‘태평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 태평농부 이영문 선생.
그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태평농’은 개발한 것이 아니라 ‘복원’한 것이라고. 우리네 조상들이 모두 그리 농사지어 왔고, 앞으로도 그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태평농은 나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고. 참으로 겸손한 생각이 아닐 수 없는데, 그 겸손한 자세로 자연을 대하니 그리도 해박한 농사꾼이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영문씨를 실제로 만나보면 생각 외로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느낌의 사람임을 금새 알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조금의 지루함 느낄 새가 없고, 태평농에 반하는 주장들을 접하고 답할 때에도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여유가 넘칩니다.
하지만 일련의 대가(大家)들이 모두 그러하듯, 자신의 생각을 전할 때에는 막힘이 없고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상당하게 느껴졌습니다. 태평농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저와 같이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관행농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만만치 않은 경력의 농부들도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당신이 틀렸소”라는 이야기 하고 싶어 그 먼길을 달려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태평농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농사가 지금껏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일까 하는 의문과 회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였기에 가능 여부를 따지고 싶어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태평농 교육의 질문시간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곤 했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결국 교육장 문을 나서며 함박웃음 짓는 농부들의 표정 뒤엔 언제나 막힘없는 답변으로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영문씨의 해박함과 솔직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곤 했고요. 또한 그의 이야기들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한 것이라는 점도 함께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자신의 존재 자체가 태평농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의 말엔 더욱 신뢰가 가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밭과 논은 그 자체가 ‘증거’가 되어 주니까.
더구나 농사 이야기 <1>에서 이야기한 종자 문제에 있어서 역시 그의 능력은 발군 그 자체입니다. 지난 봄 농진청 주최의 토종종자 기증 캠페인에세 그가 기증한 토종종자는 그 수와 품목 등을 따져 보아도 이미 개인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엔 고방연구원의 태피(태평농부)들의 노고도 함께한 것이지만, 이영문씨의 외롭고 고된 싸움의 결과임은 태평농을 아는 사람들 모두가 이야기하는 현존하는 ‘사실’입니다.
- 2010년 3월 농진청 우리종자 기증 캠페인에서 기증된 씨앗들.
종자 문제도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가며 자연을 따르는 농사꾼이라니. 어찌 태평농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부했습니다.
태평농의 원칙은 의외로 단순명료합니다.
三無원칙.
무경운(땅을 갈아 엎지 않고), 무비료, 무농약의 농법.
경운기나 트렉터를 이용해 땅을 갈아엎거나 심토파쇄하여 땅을 벌거벗기거나 흙속의 자생초 씨앗들을 끄집어 올리는 일 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경운되어 흙이 부드럽게 되도록 하자는 것이 ‘무경운’입니다. 이 때 흙을 부드럽게 경운해 주는 자연의 역할은 각종 식물의 뿌리와 지렁이 등의 흙속 생물들과 미생물들이 담당하게 됩니다. 억지로 갈아주지 않아도 이것들의 활동이 활발하기만 하면 땅은 인간이 경운한 것 보다 훨씬 부드럽고 건강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죠. 인건비와 기계운용비가 절감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흙은 스스로가 작물 키울 수 있을 만큼의 거름기를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무비료’입니다. 태평농은... 단순히 화학비료를 시비하지 말자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가축의 배설물 등으로 만든 거름 또한 굳이 만들어 밭에 뿌려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건강한 흙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이 부분은 자생초와의 공생과 흙을 피복하는 것으로 대안을 이야기 합니다. 흙을 벌거벗겨두지 않으면 지렁이 등의 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되고, 그들이 번성하여 배설물과 시체 등을 남기면 그것들이 양분이 되어 흙이 거름지게 된다는, 이 부분에서는 비료 구입비가 절감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렁이 등의 다양한 땅속 생물들을 죽이지 않으려면 농약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바로 ‘무농약’의 원칙입니다. 농약은 해충과 함께 익충들 또한 모두 죽이게 되니, 생태계 파괴의 주범임은 굳이 새삼스레 이야기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더불어 인간에게도 무척 해로운 것이 사실이고요. 태평농에서는 농약의 역할을 천적이 대신하게 됩니다. 거미, 무당벌레 등이 진딧물, 노린재 등의 해충들을 잡아먹는 자연스런 생태계의 순환 속에서 농약을 대신할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자생초들을 죽이기 위해 뿌리는 약들도 모두 흙과 그곳의 생물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니 그리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생초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머리를 써야지, 자생초 말라 죽이는 방법으로 농사지으면 안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득 보다 실이 크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죠. 이를 통해 농약 구입비와 인건비 절감의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경운, 무비료, 무농약의 원칙을 따르면 일단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부담을 덜게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재 관행농가의 걱정거리가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작물들과, 점점 높아지고 있는 인건비와 약재 투입비 문제인데,
3무원칙은 이러한 문제의 새로운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농사지을 수 있느냐가 문제이긴 합니다. ^^
그럼 과연 어떤 이유로 경운과, 시비, 농약살포를 하지 않고 작물들을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들은 이영문씨의 저서와 교육들을 통해 배울 수 있으며
제 나름의 정리를 이곳에 남겨보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이영문씨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농사는 가을에 시작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농사의 시작은 봄이라 여기기 쉬운데, 그는 언제나 가을농사가 한해 농사의 성패를 결정짓는다고 힘주어 주장합니다.
가을이 오면 일교차가 심해지며 서서히 서리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서리는 서서히 들판의 푸르름이 사라질 것을 예고하며 자생초들의 생을 마감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리가 내리면 자생초들은 서서히 죽어가며 땅은 점점 얼어 갑니다. 이렇게 땅이 벌거벗은 채 겨우내 얼어 있으면 봄 농사를 지을 때 흙이 딱딱해 경운을 필요로 하게 되며, 벌거벗은 땅에 가장 먼저 자생초들이 자리잡아 풀관리를 제대로 하기 힘든 그런 밭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내 비어있어 놀고 있는 곳 없이 마늘과 양파, 보리, 호밀, 시금치 등의 월동작물을 심는 것이 방법이라고 합니다.
특히 맥류(보리 등)파종은 흙을 부드럽게 해주며 토양의 양분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늘과 양파는 지금도 거의 모든 농가에서 가을에 심는 작물이지요. 다만... 태평농에서는 작물 심는 이랑에 비닐멀칭을 하지 말고 공생할 수 있는 작물을 심어주는 것으로 대신하라고 하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자생초가 발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지온을 높여준다는 명목하에
온 산하의 들판에 검은 비닐 물결이 가득히 출렁입니다. 하지만 비닐은 그 자체가 환경오염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지온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역효과가 극심해 작물에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이 태평농의 생각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늘을 가을에 심었습니다. 마늘 이랑들을 검은 비닐로 멀칭하지 않으면 봄이 되어 이내 자생초들이 가득 자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태평농은 멀칭 없이 마늘을 심고 그 사이사이에 상추씨를 파종하라고 합니다. 상추는 싹을 틔우지만 추운 겨울에 몸집을 키우지는 못합니다. 다만 봄이 찾아오면 그제서야 싹을 틔우려는 자생초들 보다 일찍 몸집을 키워 자생초들에게 가는 빛을 차단해 자생초와의 경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면 농부는 자생초 걱정없이 마늘 농사지어 거두고 더불어 풍부한 상추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자생초들이 생을 마감하는 가을에 밭 전체를 월동작물들로 채워주면 이듬해 봄에 자생초와의 경합에서 손쉽게 승리하여 보다 건강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소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태평농법은 언제나 ‘농사의 시작은 가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더불어 위의 마늘과 상추 예시에서 엿볼 수 있듯이 태평농법은 궁합이 잘 맞는 작물끼리의 혼작과, 윤작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직사광선을 통해 자외선을 접하는 것을 싫어하는 고구마는 키가 큰 참깨와 함께 심고, 양파 곁에는 시금치, 감자는 콩과 함께 심으면 서로가 서로를 돕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야기이지요. 이대로 한다면 자생초들과 작물이 직접 맞닥뜨릴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콩의 뿌리혹 박테리아에 모여 있는 질소양분이 주변의 작물들을 돕는 식의 상생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혼작과 윤작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작부체계를 세우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큰 노동력 들이지 않고 밭농사를 지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파종의 방법도 독특합니다. 흙을 파내어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어주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흙을 파낸 골에 씨앗을 놓고 흙을 덮어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씨앗에 흙을 덮어 빛이 닿지 못하면 씨앗은 빛을 받기 위해 싹을 올리는 일을 먼저 서두르게 되어 뿌리가 깊게 내리지 못하고 키가 커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흙을 덮지 않으면 뿌리를 먼저 내려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때문에 비바람에 버틸 수 있는 강인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저희 밭에 열무와 감자 등을 심어 보았는데, 흙을 덮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새에 의한 피해나 바람에 의한 씨앗 유실 등의 문제는 별로 겪지 못했던 기억입니다. 오히려 흙을 덮어주는 일손은 덜은 것이라 힘이 덜 들어 좋았던 기억이었고, 소풀도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특히 감자는 동네 어르신들께서 자른 면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깊이 묻어 주어야만 한다고 하셨었는데, 태평농에서는 자른 면이 위로 향하게 하고 흙을 덮어줄 필요 없다고 하여 그리 해보니 소출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요. 태평농의 태평은 또 다른 의미로 ‘태평(게으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
보다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영문씨가 말하는 태평농의 밭작물 작부체계 중 일부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늦가을에 마늘을 심습니다. 태평농의 밭은 부드러우니 굳이 경운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평농을 지어오지 않은 밭이라도 괜찮습니다. 이전에 심었던 작물이 있다면 거둘 때 작물을 뽑지 말고 베어내 땅속엔 뿌리가 그대로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 뿌리는 흙에게 산소를 공급하며 추운 겨울 동안 그것들에 의지해 살아갈 땅속 생물들의 훌륭한 삶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비닐 피복도 필요 없으니 이랑만 조금 높여준 다음 구멍을 파고 마늘을 얹어 놓습니다.
비닐 멀칭을 하면 뿌리에 산소가 제대로 닿지 못해 좋지 않고, 겨우내 따뜻한 곳을 찾는 벌레들의 서식처가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이래저래 좋지 않습니다. 흙으로 덮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대로 두어야 뿌리먼저 내리고 튼튼히 자리 잡아 비바람에 버틸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늘은 뿌리 두 개 정도만 땅에 내려도 얼어죽지 않고 거뜬히 겨울을 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늘 심은 사이사이로 상추를 파종하면 더욱 좋습니다. 그 상추가 싹을 틔워 겨울을 난 뒤, 이른 봄을 맞아 그 어떤 자생초들보다 빨리 자라 그 넓은 잎으로 빛을 가려 자생초들을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옆에는 양파를 심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양파 역시 마늘과 마찬가지로 씨앗을 그대로 두고 흙을 덮지 않으면 됩니다. 마늘과 상추 처럼 양파에게도 시금치라는 친구를 함께 해주면 좋습니다. 상추의 역할을 시금치가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은 땅엔 호밀이나 보리 등을 파종해 줍니다. 완두콩이나 자운영을 파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땅 속 깊이 뿌리 내리는 보리 등이 겨울의 땅을 얼지 않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봄에 밭을 덮을 피복물도 충분히 제공해줄 것이고요. 특히 완두콩 같은 경우는 가을에 수수를 거둘 때 대를 남겨 놓은 자리에 심으면 키가 큰 수숫대를 타고 완두콩 넝쿨이 자라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겠지요.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 왔습니다. 봄의 끝자락이 느껴지면 여름이 다가오고 슬슬 마늘 수확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동안 태평농부는 마늘밭 한가득 자란 봄 상추를 먹느라 살이 피둥피둥 쪄있을 것입니다. ^^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상추는 그 톡 쏘는 맛이 일품이어서 하우스 상추와 비교하여 생각할 수도 없는 그만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컫 먹고 난 뒤 마늘 수확하기 전에 상추 잎을 모두 거둡니다. 뽑지 말고 상추대는 그대로 남겨둔 채 잎만 모두 뜯어 냅니다. 그러면 역시 자생초에게로 가는 빛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마늘을 수확합니다. 일반 밭에서는 호미로 캐내지만 겨우내 얼지 않고 자연경운된 태평농의 마늘밭은 부들부들하기 그지 없어 손으로 살짝만 당겨도 마늘이 쑥 하고 잘 뽑힙니다.
그렇게 마늘 거둔 자리에 감자를 심어 봅니다. 감자는 씨감자에서 자른 면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여 구멍에 놓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흙을 덮어주지 않습니다. 그 다음 감자 사이사이에 콩을 심어 줍니다. 콩의 뿌리혹 박테리아가 감자에게 훌륭한 질소양분을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감자잎에 달려들 벌레들을 콩잎으로 모이게 해주는 역할도 함께 해줍니다. 콩 잎은 뜯기고 자극 받을수록 콩 꼬투리가 실하게 맺히니, 농약을 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뿐입니다. 콩과 감자의 팀워크 덕분에 분명히 실하고 맛있는 감자와 콩을 한아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양파 뽑은 자리엔 고구마를 심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구마는 자외선에 약해 햇빛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니 고구마 곁에 참깨를 파종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키가 큰 참깨는 고구마에게 가는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고구마의 넓은 잎은 주변에 자생초가 싹트는 것을 막아주니 상생도 이런 상생이 없는 듯 느껴집니다.
- 고구마와 참깨 혼작한 우리 밭의 풍경. 오른쪽은 수수와 옥수수.
물론 마늘 심었던 곳에 고구마 심거나, 양파 심었던 자리에 감자 심어도 아무 상관없으니 편한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헌데... 고추가 빠지면 섭한 것이 농사 아니겠습니까! 고추밭엔 고추 사이사이에 열무를 파종하면 좋겠습니다. 열무의 빠른 성장이 고추밭에 자생초가 나는 것을 막아주고, 고추가 만드는 그늘에서 자란 열무는 뙤양볕을 받은 녀석들보다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열무로 자라기 때문이죠.
열무를 거둘 때가 되면 미리 새 열무 씨를 파종하고 2~3일 뒤 수확합니다. 이렇게 하면 고추를 모두 거둘 때 까지 3~4번의 열무 수확을 맞을 수 있으니
여름의 별미라는 열무김치와 열무물김치를 먹다 질려 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 하셔야 합니다. ^^ 더불어 고추밭 가장자리를 따라 가지를 심어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가지과 식물인 고추는 수분할 때 가지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가지 특유의 건강한 생명력에 영향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해서 거둔 열무로 담근 물김치.
여름 내내 질리도록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여름을 보내고... 김장용 배추와 무 파종하여 대파와 쪽파와 함께 혼작하여 키우고 거두고 나면 또다시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인 가을이 찾아옵니다.
이해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고 손쉬운 농사가 바로 태평농입니다.
쌀농사는 더욱 독특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쌀농사 풍경의 으뜸인 ‘모내기’를 하지 않습니다. 마른 논에 씨앗을 직파 하는 방법으로 농사를 시작하는데요, ‘무경운 2모작 건답직파’에 모든 답은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을에... 논에 자운영이나 보리를 심어 겨울을 나고, 봄이 찾아와 모내기철이 되면 다른 논들은 모내기 하느라 한참인데 탱평농의 논엔 아직도 보리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보리를 수확할 때가 되면 보리 수확과 동시에 볍씨를 마른 논에 뿌리고 보리 베어낸 것들을 그 위에 피복해 줍니다.
물론 트랙터를 이용한 깊이갈이(로터리)는 해주지 않고 말이죠. 그러면 다른 논에 비해 늦게 벼 싹이 오르게 되는 것이지만, 모내기(옮겨 심기)에 비해 튼튼하게 내린 뿌리 덕분에 성장은 금새 따라잡게 된다고 합니다. 장마철을 맞으면 아직 키가 멀쑥하지도 않고 뿌리도 튼튼하게 자리잡아 관행농의 벼들보다 쓰러지는 일도 드물다고 합니다.
경운을 하지 않았으니 흙속의 자생초 씨앗들이 위로 올라올 일이 없고, 촘촘하게 해 놓은 보릿대 피복 덕분에 자생초들이 기를 펴지 못하게 되면, 이른바 농부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태평농 쌀농사’가 이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자란 쌀 거둘 때 마찬가지로 보리 파종하여 수확한 볏짚으로 덮어주면 보리농사 시작. ‘무경운 2모작 건답직파’는 이러한 구조로 순환하는 벼농사를 이르는 말입니다.
태평농을 공부하며 접한 책은 이영문씨 저서 [태평이가 전하는 태평농 이야기]와 [사람이 주인이라고 누가 그래요] 이렇게 두 권이었습니다. 이 책들은 단지 농사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건강, 식단, 자연과 인간, 주택, 난방 등 주제를 한정하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책들이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심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언가 자세히 태평농법을 설명하고자 시작했는데, 세세한 작물 사례들 이야기 꺼내보지도 못하고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긴 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3무원칙(무경운, 무비료, 무농약)과 혼작과 윤작,
흙을 덮지 않는 씨앗 파종과, 피복 등을 지켜나가는 농법이라면 어떤 자신만의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도 태평농과 닿아 있다고 여기면 될 것 같습니다.
이름이 꼭 태평농법일 필요는 없지요. 어떻게 짓더라도 그런 정신으로 짓고 싶기에 태평농을 따르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어쩔 때는... 처참한 저희 밭을 남들에게 보여줄 땐 태평농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않고는 합니다. 그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서. 그건 ‘자연농법’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 이고요. 그래서 저는 곧잘 ‘자연스런 농사’ 혹은 ‘환경농업’이라는 말로 애둘러 표현하곤 한답니다. 자연농법의 기무라씨 등도, 태평농법의 이영문씨 등도 모두 저처럼 처참하게 농사짓고 계시진 않으니까.^^;
태평농은 지금껏 제가 만난 많은 농법 중에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과 실천’을 가장 자세하고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는 그런 ‘철학’과도 같은 농법이었습니다.
제 글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때문에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꼭 직접 책이나 교육을 통해 태평농의 정수를 경험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글은 너무 부족합니다.^^ 태평농을 직접 접해보신다면 분명 보다 쉽게 도시 농사의 길을 결정하실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젊은 농부
'농사 유기농 재배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천연비료만들기 (0) | 2015.07.21 |
---|---|
[스크랩] 12월 13일의 꽃 유자나무 (0) | 2014.12.20 |
[스크랩] 깻묵 액비 (0) | 2014.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