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씨(仁川李氏)의 내력
<1>인천 이씨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천삼백 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왕족으로서 아득한 원대의 뿌리는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인 허황옥의 후예(後裔)로서 10명의 왕자 중에 두 명(둘째와 셋째)의 왕자에게 허황후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허(許)씨 성을 쓰게 되었으며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가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후의 후손들이며 고려 중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출(傑出)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한 명문벌족(名門閥族)이었다.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가야계(伽倻系)로 전하고 있으며 신라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으로 계신 기(奇)께서 서기 756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에 당나라에서는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으로 당나라 현종은 서촉(현:成都) 으로 피란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신라의 사신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양자강을 거슬러 성도(成都)에 이르러 현종을 호위하고 환도(還都)를 도움으로써 이를 가상히 여긴 당나라의 현종으로부터 시서(詩書)와 황제(皇帝)의 성(姓)인 이성(李姓)을 사성(賜姓) 받아 무술(戊戌)년에 환국함에 따라 신라 경덕왕은 친히 공을 높이어 (功高親書)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戶)를 봉(封)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인천 지방에 세거(世居)하면서 토호문신세력(土豪文臣勢力)으로서 복록가문(福祿家門)의 영달을 누리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대인 허겸(許謙)공을 기일세조(起一世祖)로 하여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의 본관(本貫: 貫鄕)조로 삼으니 본관도 지명에 따라(소성:邵城.경원:慶源.인주:仁州.인천:仁川) 바뀌어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분이 고려 현종 15년 서기 1024년에 증(贈)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侯)에 추증(追贈)된 이허겸(李許謙) 시조공 이며 그 후손들이 고려를 반석 위에 세웠으며 140여 년간 왕손의 가계를 이으며 찬란한 꽃을 피웠다. 무신들의 반란(정중부의 난) 으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역사는 바뀌어 이씨조선 500년 역사의 전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지금의 시중공파(侍中公派), 공도공파(恭度公派),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충강공파 (忠剛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 공도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그 후손들이 인천 이씨의 80 %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인천 이씨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억석(憶昔)’에서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713~741) 때의 모습을 “개원 전성시대를 회생하노라/작은 마을도 만호의 집이 가득 찼었다/쌀은 기름지고 좁쌀은 희었고/공사(公私) 창고는 모두 가득 찼었노라 (憶昔開元全盛日/小邑猶藏萬家室/稻米流脂粟米白/公私廩俱豊實)”라고 노래했다. 이런 전성시대는 한 때 자신과 양귀비를 부모로 섬겼던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끝장나고 현종은 잔도(棧道) 투성이의 촉(蜀;쓰촨성)으로 도망가는 운명이 된다.
송(宋)의 악사(樂士)가 쓴 양귀비 일대기인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은 중도의 마외역(馬嵬驛)에서 당 현종이 호위군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양귀비를 자결시키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당 현종은 ‘개원의 치’란 태평성대와 안녹산의 난이란 천하대란, 그리고 양귀비와 세기의 로맨스까지 한 몸에 겪은 인생유전의 황제인데, 사랑하는 여인을 죽여 겨우 목숨을 건지고 촉으로 도주해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신라 사신이었다. ‘삼국사기’ 경덕왕 15년(756)조는 “당나라 현종이 촉 지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강을 거슬러 성도(成都)까지 가서 조공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크게 기뻐한 현종은 자신이 직접 오언(五言) 십운(十韻)의 시를 지어 칭찬했다. ‘고려사’ 이자연 열전은 “이자연의 조상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자에게 신임을 받아 이씨라는 성을 받았다”라고 현종에게서 이씨라는 황실의 성을 받았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가 바로 허기(許奇)라는 인물인데, 황제로부터 사성(賜姓) 받은 이후에는 이허기(李許奇)라고 복성(複姓)을 사용했다. 최근 출간된 ‘가락국의 후예들’은 “득성조(得姓祖) 이허기로부터 10세를 내려와 이허겸(李許謙)을 1세조로 하는 인천 이씨가 탄생했다.”고 전하고 있다. 허기의 양천 이씨와 이허겸의 인천 이씨는 같은 뿌리이므로 가락종친회에 함께 소속되어 공동 시조제를 지낸다. 지진이 발생한 쓰촨성(四川省)은 인천 이씨라는 우리 역사의 한 성씨를 탄생시킨 지역이기도 하다.
<3>인천 이씨
仁川李氏의 先系는 가야계의 許氏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든 허씨들의 세보(世譜) 이전의 인물임으로 명확한 上代의 出系는 상고 할 수 없으나 다만 서기 755년 (乙未 신라 경덕왕 14년)에 아찬(阿飡)의 벼슬로 계신 허기(許奇)(허황후의 23세손)께서 신라(新羅) 사신으로 唐나라에 갔을 때 그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당헌종(唐玄宗)이 756丙申년에 촉(蜀) 나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許奇께서 호종(扈從)하였으며 757丁酉년에 난이 평정되어 황제가 도성으로 돌아와서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詩書)와 황제의 姓인 李성을 사성(賜姓) 받아 무술년(戊戌758年)에 신라로 환국 하심에 신라(新羅) 경덕왕께서 친히 그 공을 높이여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하여 세습케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허씨에서 이씨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허기(李許奇)선조를 득성조(得姓祖)라 한다.
출처 김해김씨 삼현파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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